[치과경영] 어린왕자가 말해주는 삶과 인문학
[치과경영] 어린왕자가 말해주는 삶과 인문학
  • 덴탈iN 기자
  • 승인 2023.07.12 09:10
  • 호수 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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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나라에 인문학 열풍이 휩쓸고 간 이후로 많은 기업에서 인문학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전문적인 강사를 초빙하든, 사내 직원이 준비하든, 삶과 의미에 대한 얘기를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에 사회적 공감대가 많이 형성된 걸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이런 내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직장인에게 실무적인 얘기만하고 인문학과 같은 인간적 터치가 결여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 현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소설이 한 권 있다.

 

세계 고전 문학 중에서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소유한 지식과 경험의 차이만큼 대상에 대한 흥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른에게 재밌는 책은 어린아이에겐 지루하고 따분한, 이해할 수 없는 종이뭉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의 맘을 사로잡는 책은 어른이 볼 땐 그저 뭣 모를 때나 즐겨보는 유치하고 시시한 내용들로 보인다.

 

이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작품이 있다. 1943년에 발표된 생땍 쥐페리의 어린 왕자라는 소설이다.

이 책은 반세기가 흘렀음에도 여전히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한때 재밌게 읽었다가 다시 읽으면 시시한 그런 개념이 아니라 세월의 인고가 더해질수록 풍미가 깊어지는 마법같은 책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장미와 여우의 의인화가 아이들의 구미를 당긴다면, 그들의 아리송한 대화와 수많은 메타포는 어른들의 깨달음을 자극한다.

성인 독서모임에서도 가장 자주 소개되는 책이 어린왕자인걸 보면 이 책이 갖는 매력은 세대와 시대를 초월하는 듯하다.

 

책의 내용을 잠깐 소개하자면 주인공 어린왕자는 자신이 살던 별에서 지구로 오기 전에 6개의 소행성에 들린다. 그 소행성들에는 각각 왕, 자만심에 빠진 사람, 주정뱅이, 사업가, 가로등 점등인, 지리학자가 살고 있다.

어린왕자는 이 6명의 어른 중 가로등 점등인만 빼고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이라고 생각한다.

왕은 누군가가 자신의 신하가 되길 바라고, 자만심에 빠진 사람은 남들이 자신을 숭배하길 바라고, 주정뱅이는 술만 먹길 바라고, 사업가는 부자가 되길 바라며, 지리학자는 지리만 연구하길 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하는 그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그런 일들을 하는지를 묻는 어린왕자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이 중에서 가로등 점등인만 유일하게 어린왕자가 인정했던 이유는 오직 그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로등을 관리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즉 어린왕자는 그들이 매일 반복하고 있는 그 일이 소중한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렇게 어른이 된 아이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이 생기며, 극도로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으로 인해 매일 똑같은 업무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에 매몰되고, 자신이 왜 이런 반복되는 일을 해야만 하는지, 그 궁극적인 이유를 망각한다.

물론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사랑하는 사람, 지켜야할 존재, 그들과의 관계를 위해 오늘도 천근만근한 몸을 일으키며 무기력과 싸우러 간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다만 제대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겪는 사회적 현상이고 인식의 한 특성이다.

 

바로 여기서 인문학이 힘을 발휘한다. 간헐적으로 접하는 인문학을 통해 그동안 너무 당연하다 생각해서 의식의 방구석에 처박아 놨던 일과 행위의 의미를 다시 의식의 메인 무대로 소환한다.

그렇게 끄집어낸 의미들을 곱씹으며 과업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돈하고 사랑하는 존재의 소중함을 오랜만에 되새긴다.

그렇게 하면 놀랍게도 그동안 무기력했던 하루와 지루했던 일과에서 생기가 돋는다. 왜 일하는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과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공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체험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19세기 독일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왜 사는지 아는 인간은 그 어떤 시련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을 직장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 왜 일하는지 아는 인간은 그 어떤 지루함과 무기력에도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런 마음의 특성 때문에 잘 먹고 잘 살자를 모토로 내건 성장 중심의 한국사회에서는 그동안 인문학의 중요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었다. 수치화 되지 않고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재화는 개발도상국에게 큰 메리트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얘기가 다르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경제대국이다.

많은 국가에 K-문화를 퍼뜨리며 한민족의 우수함을 지구 곳곳에 전달하고 있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한국의 위상은 개발도상국이었던 이전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승전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건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계속 증가하는 우울증과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살률을 보면 오히려 국제적 위상과 반비례 하는 듯 보인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물질적 보상과 경제적 풍요만으로는 삶의 만족을 구가하기 어렵다. 당연한 얘기지만 극도로 궁핍한 상태에선 경제적 수혈이 엄청난 삶의 만족도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를 비롯한 다른 선진국들에서 나타나는 삶의 만족도에 대한 우울한 결과들은 행복을 위한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는 걸 역설한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왕자의 이 대사가 많은 걸 시사한다. 지금껏 우리는 과학과 자본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들, 가시적인 효과가 있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덕분에 경제적, 물질적으로 큰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 시효가 다한 걸로 보인다.

인문학은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과학처럼 수치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학문임은 분명하다. “나는 왜 괴로울까?”, “나는 왜 무기력할까?” 여기까진 어느 정도 과학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뇌에서 작용하는 물질들의 관계로 설명하면 그만이다.

반면 나는 왜 일을 해야 할까?”, “나는 왜 굳이 살아야 할까?”와 같은 삶의 당위와 관련된 질문들은 과학이 답해 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의 영역은 결국 수천 년의 지혜를 담고 있는 인문학에서 얻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일과 현실에 매몰돼 실존의 방황을 겪고 있다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면, 주기적인 인문학에 대한 접근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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